두산베어스 이야기

두산 베어스 사건 사고 이야기 알려드립니다.

두목곰아재 2022. 8. 21. 11:25

안녕하세요. 두목곰아재입니다. 저번 두산 베어스 사건 사고 이야기 중 항명 파동 관련 포스팅에 이어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항명 파동 수습 및 사회적 반향

 

결국 구단과 선수들 사이에서 일종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 윤동균 감독의 사임과 항명 선수들의 복귀였습니다.
단, 항명을 이끈 선수들 중 5명의 선임인 박철순, 장호연, 강영수, 김형석, 김상호의 경우 원래 방침은 방출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부임한 김인식 감독이 김형석, 김상호의 잔류를 강력히 요청했기 때문에 이둘은잔류하게되었습니다.

또한 박철순의 경우, 인간 승리의 살아있는 전설로 등판할 때마다 공 하나에 OB 팬들이 울고 웃는, 팬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던 존재였고,OB의박철순이아닌박철순의OB라는표현이맞는그야말로프랜차이즈를넘어OB그자체였습니다.


이런 박철순을 방출시킬 경우, OB는 스포츠 구단의 존재 의의 그 자체인 팬들의 대거 이탈로 구단 운영이 아예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박철순 선수 방출 시사태 수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잔류를 시켰습니다.


여기에는 그때 당시 처음 등장한 하이텔 PC통신 불사 조동호 회의 장외서 명운동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OB 베어스의 팬 = 박철순 개인 팬이니 만큼, 여론은 절대 구단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박철순은 실제로는 떠밀리듯 후배들의 짐을 떠맡아 대표자로 나설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공개적으로 윤동균에게 양 쪽 모두 책임이 있으니 함께 물러나는 게 가장 좋다는 입장으로 마무리한 후 은퇴를 이미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박철순의 대한 팬들의 존경과 지지가 구단에서 생각한 것과는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라, 박철순은 은퇴하려고 마음을 먹었어도 은퇴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급기야 구단에서 박철순에게 은퇴를 철회하고 복귀를 바라는 은근한 호소 마 저 있었습니다.
단순한 팬층의 이탈이 아닌, '박철순을 버리면 OB를 버리겠다'라는 여론이 너무 거대해져서 두려워진 구단이 먼저 손을 내민 것입니다.


그 외에도 박용곤 회장과 박철순의 관계는 단순히 구단주와 선수가 아닌, 기적 같은 재기를 이룬 과정에서 끈끈한 인간관계가 있었기에, 프런트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화살은 다른 선수들에게 돌아갔는데, 바로 장호연과 강영수 선수였습니다. 강영수는 자유계약으로 OB에서 방출되자마자 곧바로 태평양 돌핀스가 영입을 하였습니다. 사실 항명 주동자 중 강영수의 혐의가 가장 가벼웠음에도 그를 방출하는 것에 대해 찜찜해하던 OB는 태평양에서 강영수의 영입 의사를 밝히자 "아이고 어서 데려가십시오"라는 심정으로 강영수를 웨이버로 풀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태평양 유니폼을 입은 강영수는 이듬해인 1995년 중심 타선을 꿰차고 21개의 아치를 날리며 홈런 랭킹 4위에 오르는 활약을 보였습니다. 타율은 0.243으로 영 좋지 않았지만, 원래부터 타율보다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공갈포 기질이 강했던 선수였던 데다, 태평양 입장에선 전통적으로 팀 타선부터가 그러한 공갈포의 장타율마저 소중할 정도의 물 빠따라서 이 정도 면제법 만족스러운 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킨 장호연 선수가 남아있었습니다. 이전에도 팀의 에이스라는 것을 배짱 삼아, 구단과의 연봉 협상 과정에서 매 해 심각한 마찰을 일으킨 장호연 선수를 구단에서 내보내기 위해 OB프런트는 온갖 수를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룹 고위층에서 강영수 방출에 대해 구단을 강하게 질책하며 "장호연을 (강영수처럼) 공짜로 내보낼 생각 말라"는지시를 내려 무상 트레이드나 웨이버 공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급기야 장호연을 대만 프로야구 준궈 베어스로 트레이드시키려는 꼼수도 쓰려했지만, 당시 대만은 미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양 국가 간 선수 계약 협정이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트레이드 자체가 위법이었던지라 OB는 여론의 뭇매만 실컷맞았습니다.


애초에 구단과도 감정이 좋지 않았던 장호연 선수 또한 "내가 유니폼을 벗으면 벗었지 OB에서는 죽어도 못 뛴다"라고 강하게 나오며 구단과 장호연의 사이는 더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당시 스포츠서울 야구부장이던 이종남 기자가 장호연 선수를 설득하고, 언론계 선배인 경창호 사장과 장호연 사이를 직접 중재하면서 장호연은 다시 OB와의 인연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그 대가로 연봉 삭감 최대치인 25%를 깎아 버렸습니다.

덧붙이자면 장호연은 팀을 이탈해 있던 기간에 모교인 충암고에서 개인 훈련을 하면서 후배들을 지도해 줬는데, 이때 그에게 지도받은 투수 중 한 명이 바로 박명환 선수이었습니다. 두산 베어스의 팬이라면 알겠지만, 이후 박명환 선수는 OB 베어스에 입단해 1996~2006년까지 베어스의 선발투수로 활약을 했습니다.

더불어 이 사건의 총책임자라 할 수 있는 경창호 사장은 뚜렷한 대응을 보이지 못하고 미적대다가 이종남 기자로부터 "선수들 살리는 셈 치고 희생하시라"며 구단 사장에서 내려올 것을 권유받았는데 경사장은"내가 사장된 지 3년 만에 당신이 처음 해 주는 충고가 물러 나라는 소리인가? 난 그렇게 못하겠다. 앞으로 3년은 더해먹을 거야"라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구단 고문이던 박용민 전 사장과 함께 구단주인 박용곤 회장을 찾아가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박 회장은 그 자리에서 사표를 박박 찢어버리며"이게 뭐하는 짓이야! 허튼 생각 말고 사건이나 잘 수습하라"고 반려해버렸다고 합니다.


이 스토리는 며칠 후 박용민이 이종남을 만난 자리에서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털어놓았는데, 이종남은 "이거 (기사로) 써야 한다. 선수들을 위해 사장이 희생한 건데 오히려 외부에 알려져야 경 사장 입장이 산다. 나중에 반려되었다고 후속 기사 내겠다"라고 박용민을 설득하여 결국 다음 날 지면에 경창호 사장이 살신성인했다는 요지로 사표 제출 건을 기사화했습니다.

시즌 잔여 경기는 선수 17명이 한 번에 빠져나가 꾸려나가기 어려웠지만, 2군에서 급히 선수를 끌어다가 간신히 메웠습니다. 한 때, 잔여 경기 몰수패 이야기도 나왔지만, 이것만은 막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윤동균의 후임 감독으로 김인식 감독이 취임했는데, 향후 9년이나 OB-두산의 지휘봉을 잡게 될 줄은 당시로 선상 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거기 다두 번의 우승까지도. 김인식 감독은 이 막장으로 간팀을 다음 시즌인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면서 일약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 이 사건은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 문화의 한 사례로 지목되어 상당한 이슈가 되었고 윤동균 감독은 졸지에 프로 선수에게 매질을 한 폭력 감독으로 낙인찍히고 말았습니다. 사실 윤동균 감독이 종종 흥분을 못 이겨 선수의 따귀를 때리거나 한 일이 몇 차례 있긴 했지만, 당시 스포츠계의 문화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였고, 프로야구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구타나 기합 문화가 공공연하게 남아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윤동균 감독이 유난히 심한 케이스라고 보기도 어려웠던 것입니다. 물론 그랬다고 윤동균 감독에게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해도 된다' 같은 건 어린아이들에게나 통하는 변명이고 팀을 잘 관리했어야 하는 감독이 선수들의 일탈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애초에 윤동균을 표현하는 문장은 '강할 때 너무 강하고, 약할 때 너무 약하다'였습니다. 즉, 다혈질에 불같은 성격으로 보여주기 용 쇼맨십을 곁들여 너무 오버해서 치고 나가지만, 인정에 끌리거나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는 상황에서 결단을 못 내리고 우유부단한 면이 강했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OB 베어스 창단 성골이라는 점도 있지만, 구단에 정치적인 스탠스로 이전부터 많은 구설수에 올랐으며, 결국 감독 자리에 낙점되었을 때도 팬들의 비아냥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사건이 터진 이후에도 구단을 기웃거리며 코치, 프런트로 복귀를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점에서 좋은 소리를 듣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이 선수들에 대한 동정론으로 흘러간 데에는 '체육계의 폭력 문화'라는 매스컴의 이슈화 덕이 컸고, 애초에 비난 여론이 많던 윤동균 감독을 끝까지 감싸려던 두산 구단도 여론에 밀리면서 결국 윤동균 감독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일 때문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이후 윤동균은 2001~2002년 이광환 감독 휘하에서 한화 이글스 수석 코치를 잠시 지낸 것 이외에는 현장과의 인연은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다만 KBO의 운영위원으로 재직하며 야구계와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항명 파동사건 이후

 

복귀한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연봉을 백지위임하거나 장호연처럼 대폭 낮춘 액수로 계약하면서 몸을 낮추었습니다. 아무래도'감독을 자르고 살아남은 하극상의 주역들'이라는 선배 야구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다만 장호연 못지않은 막가파 스타일이었던 김상호만은 "그동안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만큼 이번만큼은 올려 받아야겠다. 안 올려주면 은퇴하겠다."는 폭탄선언으로 다시 한번 프런트의 속을 뒤집어 놨습니다. 그나마 OB니까 이 정도로 끝났지 여기였으면 바로 트레이드나 방출행 결국 신임 감독의 '원만한 처리'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프런트는 부글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김상호의 연봉을 조금 올려주는 선에서 재계약했습니다.

 

사실 김상호를 꼭 막무가내라고만 할 수는 없었던 것이, 당시 OB 구단의 연봉협상은 더 가난했던 해태 타이거즈보다도 짜기로 유명했습니다.